현헌공파 파조 11세 휘 세칭, 배위 증 정부인 한양 조씨 합장묘
(남양주시 평내동 산9번지)
현헌공파(玄軒公派)의 파조는 10세 휘 희안(希顔)의 넷째 아드님이신 11세 휘 세칭(世秤, 호 현헌, 1487~1551)이다.
현헌공은 1519년(중종 14) 진사시(進士試)에 장원을 하였고, 현량과(賢良科)에 천거되었으나 응시하지 않았고 기묘사화(己卯士禍)가 일어나자 향리에서 지인들과 시주(詩酒)를 즐기며 세상과 멀리하였다. 세상 사람들은 공을 기묘명현(己卯名賢)으로 존숭하였으며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현달(顯達)하였으므로 이조판서에 추증(追贈)되셨다. 아드님은 도승지, 대사헌, 대사간, 충정도관찰사, 형조·이조 참판, 한성부 좌·우윤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강화도에서 일의군(一義軍)이란 의병을 조직한 두일당공 휘 첨(詹, 1515~1593)이다.
현헌공파는 다른 계파에 비하여 후손들이 많으므로 선대부터 공의 손자들 호를 따서 하담공댁, 충정공댁, 고석공댁, 다산공댁 등 4개의 댁으로 구분하여 왔다. 현헌공파의 종원수는 3천여 명으로 목문 전체의 34% 정도를 점하고 있다.
하담공댁(荷潭公宅)
현헌공의 외아드님 휘 첨(詹)의 장남 13세 휘 수흠(守欽, 호 하담, 1548~1593)의 후손을 하담공댁이라 부른다. 하담공은 종5품 의금부 도사(義禁府都事)를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셨다. 조선 후기 정2품 지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간 19세 휘 만중(萬中)은 하담공의 6대손이다.
하담공의 후손은 목문 전체의 2% 정도인 100여 명으로 주로 서울·경기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.
충정공댁(忠貞公宅)
두일당공 휘 첨(詹)의 2남으로 충정(忠貞) 시호를 받으신 13세 휘 서흠(叙欽, 자 순경, 호 매계, 1572~1652))의 후손들이다. 충정공은 문과 급제자로 관직은 정2품 자헌대부(資憲大夫)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기로소(耆老所)에 들어갔다. 아드님과 손자들께서 귀현(貴顯)하게 되었으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.
충정공의 큰 아드님으로 연천(漣川) 현감을 지낸 휘 처선(處善) 후손인 연천공종중, 둘째 아드님 휘 기선(嗜善, 호 붕계) 후손인 붕계공(朋溪公)종중, 셋째 아드님 휘 겸선(兼善, 호 용재) 후손인 용재공(容齋公)종중, 사헌부 감찰을 지낸 넷째 아드님 지선(志善)의 후손인 감찰공(監察公)종중, 좌의정을 지낸 다섯째 아드님 수옹공 휘 내선(來善)의 후손인 좌의정공(左議政公)종중으로 나뉘어 있다.
연천공종중은 김해(金海)소종중, 서산(瑞山)소종중, 직강공(直講公)소종중 등 셋으로, 좌의정공종중은 온양, 안산, 원주, 동두천 진사공종중 등 넷으로 나뉘어 있다.
충정공댁 종원수는 2천여 명으로 목문 전체의 30%를 차지하며, 서울, 경기도 등 수도권, 부산, 경남, 충청도 등에 거주하고 있다.
고석공댁(孤石公宅)
두일당공 휘 첨(詹)의 셋째 아드님으로 과거 급제하여 도승지, 함경도 관찰사, 호조참판 등을 지낸 휘 장흠(長欽, 자 우경, 호 고석, 1572~1641)의 후손들을 고석공댁이라고 칭한다.
고석공의 장남으로 경상감사를 지낸 14세 병산공(甁山公) 휘 성선(性善, 호 병산, 1579~1647), 장남 15세 휘 창조(昌朝), 전설사 제검(典設司 提檢)을 지낸 16세 휘 중정(重廷)의 후손을 전설사공(典設司公)종중이라 부르며,
금천(현 과천) 현감을 지낸 둘째 아드님 14세 휘 이선(履善, 호 이지, 1619~1694), 공주목사를 지낸 장남 15세 휘 창우(昌遇), 수직(壽職)으로 동지중추부사를 받은 장남 16세 휘 중신(重信)의 후손을 중신공(重信公)종중,
휘 창우의 4남으로 영조 때 효자정려(孝子旌閭)를 하사받은 휘 중진(重鎭)의 후손을 정문공(旌門公)종중이라고 부른다.
고석공댁 종친들은 주로 강원도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으며 종원수는 500명 정도이다.
다산공댁(茶山公宅)
두일당공 휘 첨(詹)의 넷째 아드님 휘 대흠(大欽, 호 다산, 1575~1638)의 후손들이다. 다산공은 문과 장원 급제를 하셨고 우리 문중 최초로 사가독서(賜暇讀書)의 명을 받으신 분이다. 승정원 부승지·우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. 문집으로 「다산집」이 있다.
다산공의 큰 아드님으로 성균관 대사성, 황해감사, 우승지 등을 역임한 14세 남간공 휘 행선(行善, 호 남간, 1609~1661)의 후손인 남간공(南磵公)종중과 셋째 아드님으로 사천(泗川) 현감을 지낸 14세 휘 윤선(胤善)의 후손인 윤선공(胤善公)종중이 있다.
남간공종중 15세 취원공 휘 창명(昌明)은 숙종 때 병조판서(兵曹判書)를 지냈다. 종원수는 300여 명으로 목문 전체의 4% 정도를 차지하며 전남과 수도권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.